[펌] 근대화의 실패

[주간조선 2003-08-12 18:27]  

구한말 국왕·지배층, 개인적 이익만 추구…
국제정세 어두워 ‘멋대로’ 전망
일 안하는 양반층이 ‘반 엘리트’ 적개심 유발…
국권 상실의 ‘비극’ 가져와


19세기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세상의 꼭대기에 올랐다고 확신하였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자본주의는 전세계를 상품과 금융의 망으로 연결하며 확산되고 있었고, 그들의 최고 자부심인 의회민주주의는 전세계 대중이 선망하는 정치제도였다. 영국의 과학 기술이 만들어낸 철도와 해저 전신은 전세계를 하나의 교통망과 통신망으로 통합하면서 영국으로 하여금 지구표면의 4분의 1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게 도왔다. 스스로를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국민으로 자부한 영국인들은 근면, 자조(自助), 체통 지키기 등 자신들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남을 판단했을 뿐만 아니라 ‘문명화의 사명’을 통해 자신들의 이미지대로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최근 출간된 본인의 졸저 ‘일그러진 근대’에서 필자는 19세기 말 영국이 한국과 일본을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비교사적으로 분석해 보았다. ‘일그러진’이라는 형용사를 굳이 학술서적의 제목에 사용한 이유는 한때 인류가 지향해야 할 빛으로 간주되었던 서구적 근대 문명을 비판적으로 분석해 보려는 의도에서였다. 서양의 근대는 자기와 타자(他者), 문명과 야만, 이성과 비(非)이성의 이분법적 잣대로 세상을 진단하고, 자기를 우월한 중심에 놓고 타자를 열등한 주변부적 존재로 폄하함으로써 왜곡된 세계상을 연출했다는 의미에서 분명 ‘일그러진’ 근대였다. 나아가 우리의 근대는 서구로부터 이식되는 과정에서 왜곡된 일본의 근대를 재이식 받음으로써 더욱 왜곡된 모습으로 구현되었다는 의미에서 역시 일그러진 근대였다.

하지만 비록 영국인들의 거울에 비친 우리 모습이 비뚤어진 형태로 표현되었다 해도 그들의 지적에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냉엄한 진실이 담겨 있다. 영국인들은 한국과 일본에서 뚜렷이 대비되는 속성들을 발견하였다. 일본이 부상하는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라면 한국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였다. 그러나 우리가 속도 없이 칭찬이라고 믿어온 ‘고요한 아침의 나라’의 이미지는 실상 정체(停滯)와 쇠락이었다. 예의바르고 깨끗하고 부지런한 일본인에 반해 한국인은 더럽고 무례하고 게을렀다. 그러나 영국인들에게 무엇보다도 충격적인 것은 일본인들의 강한 애국심과 한국인들의 나라에 대한 무관심, 그리고 효율적으로 통치되고 있는 일본과 부패와 착취로 신음하는 한국의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이 두 가지만 보더라도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한 이유, 그리고 우리가 실패한 이유가 대강 드러나는 것 같다.

일본 지도층 희생과 대비

19세기 말 한국과 일본을 비교사적으로 바라볼 때 우선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가 그동안 우리 책임을 구명하는 데 소홀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국권 상실과 식민지, 그리고 분단과 전쟁으로 이르는 우리 역사의 비극을 지정학적 요인이니 냉전체제니 하며 남의 탓으로 돌리는 데 열중해 왔다. 우리 책임을 따지지 않은 이유는 물론 일본이라는 너무도 확실한 범인의 존재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이 부과했다는 소위 식민사관을 벗어나야 한다는 명분하에 우리 학계는 우리의 잘못을 덮을 뿐 아니라 오히려 미화하기에 급급해왔다.

이제는 우리 책임을 적극적으로 구명하여 과거를 타산지석으로 삼는 지혜가 필요하다. 일단 영국인들이 한국 국망의 책임을 어디서 찾았는지 들어보자. 한국에 대해 가장 동정적이면서 일본 식민통치에 대해 가장 비판적이던 영국 언론인 프레더릭 매켄지는 “오늘날 한국이 자신의 독립을 상실한 것은 대체로 구 왕조의 부패와 취약성에 그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의 판단대로 국권 상실의 책임은 우선적으로 위정자들 즉 국왕과 그를 둘러싼 권력층에 있었다. 나라의 존망이 달린 위급한 시기 40년을 권좌에 있었던 고종은 조선이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던 기회를 모두 놓쳐버리는 무능함을 연출하였다. 그는 나름대로 개화를 추진하고자 했지만 그 길이 자신의 이익과 상충하자 철저히 자기 이익의 옹호로 돌아섰다. 그 결과 입헌군주제를 옹호하던 독립협회를 해산하고 전제 왕권을 강화하는 반동의 역사가 뒤따랐다. 1904년쯤 이르자 영국인들은 한국이 이미 기회를 놓쳐버렸다고 결론지었다. 국왕을 둘러싼 위정자들 역시 국가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았다. 영국인들의 관찰에 의하면 한국 국왕과 지배층은 공공정신을 결여한 채 개인적 이해관계만 추구했고 그 점에서 일본 지도자들의 헌신적 희생과 확연히 비교되었다. 한국 지배 엘리트를 움직이는 단 하나의 원칙은 “개인이나 가문의 영광”이라는 것이 영국인들의 판단이었다. 개인적 축재는 민영환같이 신망 받는 정치인에게서도 발견되었는데, 동학 농민혁명을 주도한 전봉준은 그를 가장 대표적인 탐관오리로 지목하기도 했다. 민영환을 일제 침략에 대항해 목숨 바친 애국지사로만 알고 있던 우리에게 그가 부정부패의 원흉으로 지목 받았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엘리트층이 공공정신을 결하고 있는 사정은 중국도 마찬가지여서, 양계초는 그것을 중국 기존 도덕의 탓으로 돌렸다. 즉 중화적 윤리는 개인이 국가나 사회에 대해 가지는 도덕인 공덕(公德)의 개념이 아니라 사덕(私德)의 개념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위정자들 역시 중화문화권에 속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으리라는 이유로 그들의 책임을 면해주기에는 우리의 역사가 너무도 서글프다.  

창피한 줄 모르는 ‘양반’

19세기 말~20세기 초 국난의 책임은 소수 위정자를 넘어 사회 엘리트층인 양반에게서도 발견된다. 과연 지식인들 혹은 넓은 의미의 양반층은 국난을 극복할 대안을 제시했는가. 위정척사를 고집하던 수구파는 말할 것도 없고 동도서기론자나 개화파도 국제정세에 어둡고 제한된 전망에 머물러 있었다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냈으며, 공공정신을 결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영국인의 관찰을 들어보자. 저명한 여성 탐험가로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했던 이사벨라 비숍의 판단에 의하면, 양반이란 “자신의 생계를 위해 절대로 일해서는 안 되지만” 그 아내들이 “숨어서 바느질이나 세탁일을 해서 버는 돈”에 얹혀 살거나 친척의 도움을 받는 것은 불명예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멀쩡한 사람이 자신의 노동과 노력이 아니라 남에게 의존해 사는 것이야말로 최악의 저주라고 믿는 비숍에게 양반층의 존재는 한국의 미개성의 표징이었다.

이러한 양반의 속성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엘리트에 대한 적대감의 기원이 아닌가 생각된다. 책임은 수행하지 않고 군림하려고만 했던 우리의 엘리트들. 현재 제기되고 있는 서울대 폐교론 같은 평준화의 요구는 조선시대 이래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지 못했던 엘리트에 대한 반감의 표현이 아닐까. 영국에서 엘리트를 없애자는 주장이 제기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귀족이라는 신분적 엘리트에 대한 반감은 소수 급진주의자에게서 발견되지만, 지적ㆍ문화적 엘리트에 대한 적대감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로크나 벤담, 존 스튜어트 밀과 같은 지식인들의 공헌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지식인들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 우리의 비극이었다. 지적ㆍ문화적 평준화는 나라가 망하는 지름길이지만 그런 요구가 제기되는 사정은 이해 가능하기도 한 것이다.

더 많은 ‘서재필’이 필요

그렇다면 21세기의 지식인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100년 전 우리 지식인들이 ‘후쿠자와 유기치’와 ‘양계초’를 통해 세상을 배웠다면, 우리는 이제 세계의 미래를 누구보다 먼저 감지하고 예견할 수 있는 지식인과 엘리트를 생산해내야 한다. 우리에게도 예외는 있었다. 서재필 같은 이는 국제 정세를 꿰뚫어보고 한국과 같은 약소국이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 가운데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강대국들의 세력관계를 잘 이용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서재필은 문명개화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궁극적으로는 제국주의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다른 지식인들과 달랐다. 그리고 서재필에게 그런 안목을 제공해 준 것은 그의 미국 경험이었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서재필’이 필요했고, 지금도 필요하다. 반도적(半島的) 입장에서 떨어져나와 상황을 거시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춘 지식인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평준화가 아니라 오히려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통해 어느 나라, 어느 사회의 지식인들보다도 뛰어난 지식인을 만들어내야 한다. 19세기 말의 위정자들이나 양반처럼 개인과 가문의 영예가 아니라 사회 전체를 염두에 둔 진정한 엘리트를 생산해내는 일이야말로 지금 무엇보다도 필요한 과업이다.

‘열렬한 애국심’ 한국서 발견 못해

19세기 말 영국인들의 관찰에서 두 번째 놀라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들이 일본인들에게서 발견되는 열렬한 애국심을 한국인들에게서는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 국민이 보여주는 맹렬한 애국주의에 비추어 볼 때 놀라운 관찰인데, 이는 민족주의가 자연발생적인 것도, 불가피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민족주의는 식민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형성된 것이지 그 자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현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민족주의는 20세기 들어 동양주의, 범아시아주의, 사회주의 등과 겨루어 승리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압도적 이념으로 자리잡았다. 일본의 경우에도 메이지 지도자들의 치밀한 기획 속에서 국민과 국가주의가 탄생했다.

그렇다면 민족주의는 여전히 바람직한 이념인가? 지향해야 할 목표가 독립된 국민국가일 때 민족주의는 대중을 동원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이념이었고, 그 때문에 압도적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민족주의의 한계 역시 분명하다. 하층민이나 여성 등 우리 근현대사에서 민족과 계급의 이름으로 부차화되고 주변화된 존재들을 생각할 때 민족정체성이 민족 전체를 아우르는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해진다. 게다가 민족주의는 나와 남의 테두리를 정하고 구별짓는 것이 분명한 이데올로기이다. 세상의 모든 민족들은 자신들의 ‘예정된 숙명’에 대한 믿음과 ‘영광과 구원의 신화’를 가지고 있다. 문제는 모든 민족들이 한결같은 신념을 가지고 있을 때 각 민족은 자신만이 진리임을 입증하고자 다른 민족의 신화를 짓밟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주의는 본질적으로, 태생적으로 파괴를 함유하게 마련이다. 많은 민족들은 또한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비참한 민족’이라는 자기 이미지에서 일종의 위안을 얻고 있다. 그들은 외형적 허약함을
보상하고자 내적ㆍ정신적 순수함과 고결함으로 무장하며 ‘가장 고통받는 자가 결국 승리한다’는 신화에 집착한다. 그러나 한 나라의 역사가 예외적이라면 다른 많은 나라들도 ‘예외적으로 비극적이고 참혹한’ 역사를 경험하였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편협한 역사의식을 버리고 자국 역사를 객관적이고 넓은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맹목적 애정이 아니라 창조적 비판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21세기가 지향하는 사회가 다원적 정체성의 사회라면 배타적 민족주의 이념이 더 이상 강점이 아니라는 사실도 자명하다.

자체적 민족주의도 없었다

우리의 근대가 ‘일그러진 근대’가 된 연유는 근대성의 수용이 일본이라는 여과장치를 거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의 근대성 논의는 식민주의를 제외하고는 생각할 수 없다. 한때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의 논쟁이 뜨거운 적이 있었다. 식민지 수탈론은 기본적으로 조선 후기 한국 사회가 내재적 발전을 추진해왔는데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세계체제에 편입되고 식민지가 됨으로써 자주적 근대가 좌절되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의 오류는 그들이 상정하는 내재적 발전이 자본주의적 발전을 의미한다는 사실에 있다. 조선 사회가 내적 성장을 이룬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자본주의적 발전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면 식민지 근대화론은 일본의 의도가 제국주의적 수탈과 착취였음을 인식하면서도 우리의 근대가 식민지시대에 시작되었고 그 효과가 오늘날에 미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기억할 점은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자’로 낙인 찍힌 학자들이 일본 힘에 의해서만 우리의 근대화가 가능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비록 하드웨어는 일본에 의해 제공되었지만 우리의 역량이 근대화에 불가결한 요소였고, 그것이 결국 식민주의를 경험한 다른 많은 민족들과는 달리 지금 우리가 성취한 것을 이루게 한 근본 요소였다는 것이다.

수탈론과 근대화론의 논쟁이 존재했다는 것 자체는 식민주의와 반(反)식민주의를 이분법적으로 파악하고, 그 양축 사이에 존재하는 광범위한 회색지대를 부인하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한국의 근대성과 식민주의의 복잡하고 중층적 구조를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일제하에 시작된 근대화에는 긍정적 효과도 있었고 부정적 효과도 있었다. 토지 사유권의 확립, 조세제도의 개혁, 인구 조사, 근대적 법체제의 확립, 그리고 국가와 국민의 관계 설정 등 근대적 제도들이 이 시기에 정립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빼앗긴 전통적 권리와 이권도 분명 있었다.

중요한 사실은 근대화가 일제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그 사실이 자동적으로 한국인들을 단순한 소극적 수용자로 만들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일제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한국인들은 근대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내 것으로 만들었으며 그 형성에 참여한 적극적 행위자였다. 그 기반 위에서 1960년대 이후의 근대화도 가능했던 것이다. 식민지 근대성의 중층적이고 다원적 구조와 효과를 인정할 때 비로소 역사란 저항과 협상, 모방과 도전, 변화와 재창조의 복잡한 과정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최근 본지상에서 논의되었듯이 19세기 말의 상황에서 21세기를 위한 시사점을 찾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일 것이다. 물론 100년 전과 오늘날은 여러 면에서 동일하지 않다. 19세기 말은 근대성이 최고조로 달한 시기였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탈근대의 담론에 둘러싸여 있다. 근대성이 반드시 바람직한 것이 아니듯 탈근대 역시 반드시 자유와 해방의 공간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나 탈근대성이 주는 한 가지 이점은 우리로 하여금 이분법적인 경직된 사고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것이 상대주의와 혼란으로 종착된다는 우려도 존재하지만 개방적이고 다원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근대성의 긍정적인 면을 유지하면서 탈근대성으로 그것을 보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위험한 ‘하향 평준화’ 주장

앞에서 우리는 100년 전 국권 상실의 가장 큰 책임이 위정자들에게 있었음을 보았다. 19세기 말이나 마찬가지로 결정적이고 위급한 이 순간,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아마추어 정치가들의 실험은 그때와 마찬가지의 심각한 위험을 야기할 수 있다. 그들의 시행착오가 다른 의미의 국권 상실로 이르지 않도록 국민 모두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과거 엘리트의 잘못을 근거로 엘리트를 없애고 하향 평준화를 이루자는 주장 역시 위험하기 짝이 없다. 무엇보다도 경제적ㆍ사회적 상류층과 지적ㆍ문화적 엘리트를 혼동해서는 안될 일이다. 엘리트와 대중은 서로를 인정하고 보완하는 사회체제를 만들어내고 유지시켜야 한다. 서로를 질시하고 배제하고 타자화하는 사회에서 통일된 국론이 나올 수 없는 법이다. 19세기 말 영국 외교관들은 한국 정부의 무능과 지배층의 파벌싸움, 그리고 대중의 무관심에 실망하여 한국인들은 스스로 개혁할 수 없는 사람들이므로 일본 손에 맡겨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똑같은 잘못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의 지혜를 모을 때다.

박지향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by Capuccino | 2008/02/10 12:41 | History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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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ddd at 2008/02/10 13:22
민족주의를 정말 타파하기 위해선

일본 제국의 대동아 인종주의에 복무했던 박정희같은 제국주의적 민족주의자

들에 대한 철저한 역사적 척결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1930년대 이전의 친일파들은 일본의 침략적 민족주의에 복무한거고

30년대 이후의 친일파들은 대동아 인종주의에 복무한 역사적 범죄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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